Anyway



2012. 5. 6


여러 권의 책을 섞어 읽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책들간의 경주처럼 되어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3~4권의 책을 함께 읽다가 결승선까지 함께 골인하는 것은 1권 정도. 나머지는 첫 부분만 읽고 어느새 한적한 곳에 쌓아두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열 권이 넘는 책을 여기저기 연결해 가며 나름 초병렬 독서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의 독서는 지식의 네트워크 형성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고.. 반성은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앞 부분을 읽고,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비슷한 시기에 읽고, 거기에 대니얼 카너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다가, 샤를르 페펭의 《세계철학 백과사전》을 읽고, 거기에 질 들뢰즈가 쓰고 박정태가 엮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앞 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 같은 저자의 책을 연달아 읽거나 비슷한 주제를 품고 있는 책을 함께 읽는 것의 유용함 같은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서다.

 

허나 나는 동일 저자의 책을 연달아 못 읽는다. 아니, 그런 식으로 읽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함께 읽는 것도 꺼려진다. 설사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연속해 읽는 일은 학창시절의 공부를 떠올리게 하고, 내게 공부라는 말은 부정적이다. 재미있는 공부. 라는 말처럼 웃긴 말도 없다고 생각하는 축이다. 개그콘서트가 아무리 재미 있어봐라. 그걸 보고 비슷하지만 다른 개그를 만들어야 하는 다른 개그맨들에게 그게 재미있기만 한지. 시청자들도.. 연속해서 한 20편을 보면 개그콘서트가 재미 있다는 말은 입에 달지 못할 것이다. 하는 심정인 것이다. ‘공부라는 말에는 반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고, 반복은 또한 억압같은 것을 심중으로 느끼게 한다. 난 어쨌든 억압.은 싫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있어서, 니체에게 있어서 이 반복은 내가 생각하는 반복과 뉘앙스가 다르다.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새삼스레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도 인문학 공부라는 것을 일종의 삶을 위한 적정기술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말과 사물》의 도입부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분석하는 그 유명한 장인데, 이것을 이해하기 보다 쉽게 한 텍스트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중 <플라톤주의를 뒤집다(플라톤과 시뮬라크르)>였다. 그리고 이 들뢰즈의 글을 읽는데 《들뢰즈 개념어 사전》이 암약적으로 큰 효과를 발휘했고, 또한 이들을 읽는데 카너만의 유명한 시스템1과 시스템2. 그 둘을 생각해낸 그들의 방식 그리고 창조해 낸 개념의 속살 같은 것이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지 하면서 읽자 흥미가 더해졌다. 페펭의 글은 거기에 덧붙여 (특히)프랑스 철학자들의 어떤 에피소드적 면모를 가볍게 느낄 수 있어 막간을 적절히 채우는 역할을 했다. 다섯 권의 책이 하나의 팀을 이뤄 함께 뛰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라 반갑지만, 나는 소설을 읽고 싶다고~!

 

그러니 이 다섯 권의 운명은(두 권은 이미 읽었지만) 또 어떻게 흘러갈지알 수가 없구나.



바셀린 붓다 : 과정의 문장

바셀린 붓다

정영문, 자음과모음

 

 

1.

이것은 결과가 좋은,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그런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의 형태는 SQL 쿼리(Query)를 떠올리게 한다. 엔터 키를 탁 치면 무언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문장. 아마도, ‘그리고(and)’혹은(or)’. 이 두 접속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문장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이 270여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는 쿼리문에 엔터 키를 탁 치면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정의 문장, 어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문장이다. 인간의 소장. 7미터짜리 꼬불꼬불하고 부드러운 관을 마치 음식물이 되어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준다. ‘그리고혹은그리고 쉼표(,)로 연결되는 그 리듬에 정신을 실으면 곧 꿈틀꿈틀 연동운동을 느끼게 된다. 뭔가 밀어내고 뭔가 자꾸 나를 휘몰아치는 기분. 드럼 세탁기 속 빨래들 처지가 된 것 같은.

 

 

2.

이 소설의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가능할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하나의 생각거리를 머리에 떠올린 채 산책하듯 배회하듯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상념들. 무언가 하나의 사물을 봤을 때 연상되어 떠오르는 관념과 경험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종이에 옮긴다면 이와 비슷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똑같진 않겠지. 도둑과 돌고래와 염소와 양과 쥐, 올빼미와 고양이와 벤치와 백조와 놀이공원과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과 궁전들과 호텔들과 베케트와 몰로이와 울프와 등대로와 비트겐슈타인. 정영문이 토해내는 얘깃거리들은 당연히 독자들과 다르다. 하지만 독자들 또한 정영문의 얘깃거리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체를 베끼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건 문장력의 문제도 관념의 틀의 문제도 아니다. 전정기관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일단 어지러워서 쓰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우리들 생각의 편향. 인간의 뇌는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길게 무의미한 것들을 풀어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3.

무의미. 라는 말을 썼지만, 물론 우리의 사고는 이 무의미에서 기어코 의미를 뽑아내고야 만다. 서사를 꺼린다. 는 저자의 말과 사실주의와의 기나긴 전쟁. 이라는 표현을 보면 짐작되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서사를 꺼리지만서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것이 작품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4.

작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나를 휘저어놓기는했으나, 나를 휘어잡는 순간은 없었다.

 

 


외침과 기도 : 색채가 곧 사건.


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김은모, 북홀릭

 

 

1.

검붉은 사막의 바다, 푸른빛의 하늘과 노란빛 대지 그리고 하얀색 풍차, 얼음 속에 갇힌 꽃처럼 선명한 가을 색채의 들판, 원색 벌레가 돌아다니고 너무나 선명한 꽃들이 우거진 녹색 식물 사이로 어른거리는 밀림, 무희처럼 흩날리는 하얀색 눈꽃. 사건이 이뤄지는 장소마다 바뀌는 배경색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원색의 강렬함. 장소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알맞은 미스터리를 꾸민 것 같은 느낌.

 

2.

미스터리는 유쾌했다. 독자를 앞에 두고 간단한 마술을 부린 듯 배경의 색채와 어울려 기묘한 분위기를 낳았다. 배경을 이루는 원색의 강렬함은 일종의 광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복선처럼 주어진 색채라고 해야겠다. 처음엔 색채가 툭 던져지고 미스터리가 실꾸러미가 되어 독자를 유혹하다가 마지막 한 순간 짧게 드러나는 진실. 옅은 광기와 미스터리가 어우러져 미시적 환상이라고 부를만한 풍경을 보여준다.

 

3.

미스터리에서 장소는 아주 중요한 장치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사건을 규정하는 구성적 장치이기도 하고, 색채를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색채는 사건의 의미와 인상을 독자의 촉각에 와 닿게 하는(원색의 강렬함은 시각 보다 촉각을 자극한다.) 기능을 하고 있다. 뭐랄까이 소설에서는 장소-색채가 곧 사건인 것이다.

 

 


미겔 스트리트 : 성장하거나 떠나기.


미겔 스트리트

V. S. 나이폴, 이상옥, 민음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던 마침 그때 석양이 지고 있었다. 누렇고 하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내 시야에서 태양은 사라져가고, 그때 문득, 읽고 있었던 <<미겔 스트리트>>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성장하고 있거나 떠나는군.’ ‘해트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미겔 스트리트>>는 회고록이다. ‘회고라는 게 무엇인지. 하나는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것. 새벽에 깨어나 옛일을 떠올리든 한낮에 그랬든 상관없이 회고는 근본적으로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점. 우주가 그렇게 운행됨으로써 나이 들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경험의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지게 되어 생겨난 생각-느낌들. 두 번째는 저것,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태양이 자연스럽게 대지 위에 눕기 전에, 내가 먼저 석양을 떠나 보내게 되었다는 것, 그러자 무언가 절박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것. 그러니 회고는 또 하나, ‘떠남의 생각들이라는 것. ‘떠남의 예감 같은 것. 저 저녁나절의 생각들은 노스텔지어로 물들어 있고, 저 떠남의 생각들은 옛일을 다른 시각으로차분하게(또는 무겁게) 보게 한다는 것. 읽는 내내 이 이중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글의 시작은 나를 완전 포복절도하게 했던 이 인용문으로 하려 했었다.

 

결국 바쿠는 자기 아내를 구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말하기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자 여러분이 바쿠 부인의 생김새를 마음속에 올바로 떠올리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 축소 모델로 배()를 한 개 생각해야 한다. 바쿠 부인은 하도 살이 쪄서 자기 팔을 옆구리에 붙이면 그 팔이 마치 두 개의 마주 보는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쿠 부인이 그 꼴로 싸울 때 지르는 소리란...

해트는 늘 말했다. “축음기 음반을 거꾸로 빨리 돌린다면 저런 소리가 날 거야.”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라는 말에서 완전히 빵 터졌는데내 글의 첫 문단이 칙칙하다고 해서 이 소설이 칙칙한 내용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삼미 슈퍼스타스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허삼관 매혈기>>처럼 처음부터 배꼽 잡게 하지는 않지만, 소설 곳곳. 웃음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저 인용문에서 보듯 순수하게 마냥 웃음지을 수는 없다. 인용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아내를 구타하는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등장하는 사내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모두 영락없는 실패자들이다. 한창 인구에 회자되었던 말을 쓰자면 루저들. 바로 이 부분에서 몹시 쓰라렸다. 80년대 시골 소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이 골목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략 감이 왔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알던 어른들의 모습들이 소설 속 인물들 뒤로 꽤나 많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그 어른들한테 갖고 있던 감정들을 내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심정도 나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와는 다르다. 하나는 나이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마 기질의 차이 때문이겠지. 해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화자는 자신의 일부가 죽었다고 말했는데, 그때 나이가 열 다섯이었다. 나는 나의 일부가 죽었다라고 느꼈을 때가 아홉 살이었으니까. 6년의 차이. 동심을 유지한 기간의 차이. 아마 나와 화자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보다 더한 결정적 차이는 적도 부근 카리브 해와 한반도의 분위기 차이겠지. 누가 더 긍정모드인지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만 봐도 알 수 있지.

 

 

유쾌하게 보자면, 소설은 트리니다드 섬의 한 빈민가의 모습을 애정을 갖고 회고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 중 이름없는 물건을 만드는 자칭 목수 포포와 생긴 것과 다르게 겁쟁이인 빅풋, 꽃불 전문가 모건, 자칭 기계 천재 바쿠, 미친 사람 맨맨 등은 캐릭터 자체가 코믹 만화에 등장할 법하게 웃기다. 반면, 미국문화에 빠진 해트의 친동생 에드워드나 자기 아내를 몹시도 괴롭히는 토니, 혐오스런 조지 같은 인물들을 보면 다시금, 노스텔지어적 마인드 상태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변하게 되고 이 루저들 곁에살아야 했던 여인들과 아이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내가 아주 이중적이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를 실제 만난다면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해트와 시인 B. 워즈워스만 빼고. 돈도 못 벌면서 애들은 싸질러놓고 허구한 날 아내와 애들을 패기만 하는 사내들. 바람 피고 들어와 그걸 당연시 여기며 도박과 술에 쩔어 사는 위인들. 정신이 약간은 돈 사람들. 한 편의 에피소드로 읽는다면 그냥 지나칠 것들이지만, 그 에피소드에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상상과 경험으로) 곁들이면 어느새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만나게 되지. 그 현실에서 나는 이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어떠한 권리도 내겐 없지만 용서할 수도 없다.

 

 

허나 나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태어나 트리니다드라고 불리는 작은 섬과 함께 살아야 했던 이 인물들을 보고 어느새 아련함, 가엾음 같은 것들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몸에서 떨어지는 하얀 각질들 같은.. 어떤 것처럼, 인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수 없는 것들. 소설은 정신은 더욱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얼굴엔 파안대소와 씁쓸한 미소를 동시에 짓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 두 인물의 사소한 행동 같은 것들이 가슴을 울린다. 크리켓 게임의 스코어보드 읽는 법을 화자에게 가르쳐주던 해트의 말 왼쪽에는 타격을 마친 타자의 이름이 나와 있어”… ‘아웃당했어 라는 거친 말이 아니라 타격을 마친타자 라는 멋진(또한 매우 윤리적인) 말을 쓸 줄 알았던 사내 해트와 사랑하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짧은 시로 전해줬던, 그러면서도 죽음이 가까이 오자 아직 어렸던 화자에게 그 모든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B. 워즈워스. 진심의 사내. 찐한 뭔가가 목구멍까지 탁 치올리게 만든 두 남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유재하의 노랫말처럼 모든 옛 일들을 매끈하게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보듬어야 할 가슴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겠지.

 

 

 


로마의 테라스 : 에칭(etching)으로 그린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문학과지성사

 

되고 싶던 인물로서 기억되는 작가는 운이 좋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되었던 도스토옙스키, 햄릿이 되었던 셰익스피어, 돈키호테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어 했던 알론소 키하노가 되었던 세르반테스. 더불어 소설가로서의 본성 외에 다른 본성을 소설에 반영할 수 있었던 작가도 운이 좋다. <검은 책>에서 화가 같았던 오르한 파묵. <광대 샬리마르>에서 기자 같았던 살만 루슈디. <이민자들>의 제발트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로마의 테라스>에서 키냐르는 몸므가 된다. 그리고 판화가로서 소설을 써냈다.

 

몸므는 에칭 판화가다. 에칭, 드라이포인트, 메조틴트 기법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키냐르는 그 음각(陰刻)의 판화 같은 유연하면서도 강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문장을 파낸다. 그림을 새기기 위해 온몸으로 밀어내듯 쓴 글이다. 그 문장들이 때때로 전혀 다른 차원을 건너뛰어 내 영혼에 새겨지는 듯 하다. 케테 콜비츠의 <카를 리프크네히트에 대한 추모>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 여성 판화가가 그린 강렬한 투박함, 남성 판화가가 그려낸 섬세한 관능. 케테 콜비츠를 떠올려서인지 몸므-키냐르의 스타일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몸므는 떠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나니의 곁을 도주하듯 떠난다. 하지만 그 탈주선은 커다랗게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언제나 첫사랑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귀환선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를 찾아온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그의 태도에서 탈주와 귀환. 그 강렬한 욕망 사이, ‘사이(간격)’를 잃지 않으려 참아내는 예술가의 한 단면, 고독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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